易中天 의 품인록과 함께 구매했던 책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8인의 참모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은 킹메이커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소제목인 8인8색 참모들의 리더십이 더 어울린다.
이 책도 좋지만 각 인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진다면 조선왕조실록이나 제왕들의 책사 - 조선시대 편를 보면 좋다.
책에서 소개해준 8인
정도전과 하륜은 왜 각자의 길을 갔는가?
태조 이성계가 1329년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 왕조을 세웠다.
정도전과 하륜은 역성혁명 과정에서 핵심 참모로 움직였다.
정도전과 하륜은 우왕의 후계자 문제가 불거지면서 갈라서기 시작했다.
위화도 회군에 성공한 이성계 일파는 우왕의 아들이 아니라 다른 종실을 왕으로 옹립하려 들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고 요승 신돈의 자식이기에 가짜 왕씨를 폐하고 진짜 왕씨를 세워 왕실의 정통성을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개혁정책에 동조할 만한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적극 주장하고 나선 이가 정도전이다. 하륜은 정도전과 생각이 달랐다. 우선 우왕이 왕씨가 아니란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정당한 왕위 계승자를 확실한 증거도 없이 내친다는 게 억지라 여겼다.
민심을 얻기 어려운 처사라고 생각한 그는 이색의 주장대로 우왕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는데 동조했다.
결국 우왕의 아들이 창왕으로 왕위에 올랐다. 한데 최영의 생질이던 김저가 우왕의 지시를 받고 이성계를 제거하려던 사건이 발생하는 바람에 하륜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길에 올랐다.
죄목은 우왕을 옹호했다는 것이다. 표전 문제로 조선 조정은 들끓었다. 의견도 엇갈렸다.
그때 하륜은 정도전이 직접 명으로 들어가 해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병을 핑계로 이를 거부했다.
명의 처사는 내정간섭이라고 강조한 뒤 요동을 정벌하자고 주창하고 나섰다. 태조 이성계 입장에서도 정도전을 보낼 수는 없었다. 개국공신이자 가장 총애하는 신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정도전이 명에 들어가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이성계는 하륜을 계품사(計品使)로 삼아 명에 가서 문제를 해결토록 했다.
하륜은 본국의 사정을 잘 설명한 덕에 명의 양해를 얻어 무사히 돌아왔다. 그 결과, 하륜은 중신들의 신임을 얻은 데 비해 정도전은 비겁자란 소리를 들었다.
정도전은 반명(反明)과 요동정벌의 기치를 내세우며 반전을 시도했고, 하륜과의 반목은 더욱 깊어졌다.
정도전과 하륜은 지도자에 대한 역할이나 바람직한 국가상에 대해서도 시각차가 컸다.
정도전은 국가가 신하들에 의해 운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군주 일인이 지배하는 전제정치를 혐오했다.
때문에 일찍부터 자신의 뜻과 이상을 실현해줄 수 있는 인물을 찾았다. 그때 등장한 게 이성계다.
이성계는 당시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새롭게 떠오른 무장이었다.
정도전은 한시도 이성계 곁을 떠나지 않았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고, 이성계가 있었기에 정도전도 자신의 웅지(雄志)를 펼 수 있었다.
고기가 물을 만난 것 같았다. 만년(晩年)에 그는 이성계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말한 적이 있다.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쓰기도 했지만 장자방이 또한 한 고조를 썼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돈독한 관계는 세자 책봉(冊封)에도 반영됐다. 태조 7년 하륜을 외직(外職)으로 쫓아낸 이성계와 정도전은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세자로 책봉된 건 태조의 여덟번째 아들 방석. 태조에게는 원래 두명의 부인이 있었다. 본부인 한씨와는 방우와 방과, 방의•방간• 방원•방연 등 아들 여섯을 뒀다. 한씨 부인은 일찍 죽고 장남인 방우도 태조 2년에 죽었다. 후처 강씨 부인에게선 방번•방석의 두 아들을 얻었는데 그 중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방석의 세자 책봉이 누구의 뜻이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이성계 보다 정도전의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나이 어린 방석이 후계자가 되면 신권 중심의 정치를 꿈꾸던 그의 이상이 훨씬 실현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쉽게 지나갈 리 없었다.
한씨 부인 소생의 아들들이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다섯째 왕자인 방원의 불만이 제일 심했다.
이방원은 야망을 지녔을 뿐 아니라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392년 3월 조선 건국의 마지막 걸림돌이던 정몽주를 제거한 것도 그다. 더구나 이방원 곁에는 하륜이 버티고 있었다. 정도전과 방석 쪽은 일단 하륜을 외직으로 쫓아낸 뒤 이방원을 제거하려 들었다. 낌새를 눈치챈 이방원은 선수를 쳤다. 태조 7년(1398) 7월 안산군수 이숙번을 불러들여 군사를 모아 방석과 방번 형제를 살해했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건 정도전의 책동(策動) 때문이라며 정도전•남은 등을 제거했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자 이성계의 최측근이던 정도전은 하루아침에 세상을 떴고, 이성계는 한쪽 날개를 잃었다.
훗날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이 작전은 하륜이 지휘했다.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 있던 그는 몰래 한양으로 올라와 이방원의 곁을 지켰다. 하륜은 일찍이 이방원의 관상을 보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지했다.
이성계는 창업으로 끝나야 하며 수성에 적합한 인물로는 이 방원을 꼽았다.
허약한 군주보다는 강한 추진력을 가진 사람만이 어렵게 세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야만 신하도 왕을 도와 일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방석같이 어리고 약한 인물은 수성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이방원의 장인 민제에게 이방원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둘의 만남이 이뤄졌고, 돈독한 관계가 성립됐다.
황희의 두가지 모습
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그는 늘 원리원칙대로 행동했고, 무엇이 진정 백성을 위하는 일인지 깊이 생각했으며 정승으로 몇십년을 지내면서도 끼니를 거르는 날이 허다할 정도로 검소했다." 라고 쓰였다.
그는 두문동의 변절자로 정치를 시작하여 이십여년간 정승을 지내며 가슴 속에 한결같이 간직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마음' 그것이었다, 그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바로 백성을 위하여 온 마음을 기울였기에 명재상으로 남을수 있었던 것이다, 황희는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동안 정승자리에 있으면서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흔치 않은 정치가였다.
: 제왕들의 책사(조선시대 편)
그는 죽는 날 까지 자신의 원리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했으나 때로는 인간적인 결함을 드러내는 몇가지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실록은 그가 자신의 아들 치신에게 관청에서 몰수한 과전을 바꾸어 주려고 글을 올려 청하기도 하고 그의 서자 중생이 궁중 물건을 훔친 것이 발각되자 그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고는 성을 '조'로 바꾸어 버린 일도 있었다. 그렇다면 세종은 왜 이렇게 황희를 총애했을까.
세종은 누구보다도 황희의 비리사건을 꿰뚫어 보고 있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희에게는 '비리사건' 조차 눈 감아 넘겨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정치력이 있었다. 세종이 필요했던 것은 황희의 청렴결백한 도덕성이 아니라 조선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재능의 정치력이었던 것이다. 결국 세종은 약간의 흠집에도 불구하고 황희를 버리지 못했다.
신숙주의 평가는 옳은가?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고,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와 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신숙주가 자신의 학문적 정치적 벗들이 참형을 당하는 순간 인간적 괴로움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자신을 부끄러워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숙주는 살아남아서 영락제의 무덤 앞에서 결심했던 바를 이룸으로써 조선조 500년 왕업의 초석을 이룩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朝日) 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와 함길도(咸吉道)의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여진(女眞)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와 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했으니 당태종(唐太宗)에게 위징(魏徵)이 있었듯이 세조에게는 신숙주가 있어 왕업을 이룰 수 있었다.
중종과 조광조
조광조의 참신한 개혁정책의 최초 후원자였던 중종은 자신을 왕위에 올린 훈구파를 과격하게 공격하는 조광조 일파의 급진성에 점차 불안해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수기(修己)를 통하여 국왕 자신이 성인(聖人)이 될 것을 요구하면서 왕권에 제약을 가하는 것은 특히 부담이 되었다. 중종은 서서히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 세력들의 급진적인 이상정치 요구와 개혁정책에 염증을 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조광조는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이것은 중종을 비롯한 지지 세력을 이탈시키고 훈구세력을 중심으로 한 반대세력의 힘을 강고하게 결집시켜주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중종반정 공신 중에서 76명의 공을 깎은 위훈삭제사건(僞勳削除事件)을 계기로 '走肖爲王'란 나뭇잎에 새겨진 글씨로 훈구세력의 모함을 받아 화순 능성현으로 유배되었으며 12월 20일에 사약을 받았다.
정암 조광조는 이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임금 사랑하기를 아버지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내집 걱정하듯 하였네 하늘이 이땅을 굽어보시니
내 일편단심 충성을 밝게밝게 비추리
유성룡과 징비록
그는 시대를 꿰뚤어보고 비전 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이순신과 권율 등을 천거하여 전쟁에 대비하게 한 점도 그의 뛰어난 인재발탁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하나, 유성룡이 보여준 위대함은 유연한 사고와 융통성 이다. 그는 보통 남인으로 분류되지만 당파에 기울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유연한 사고는 교조화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다양한 대안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게 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겪은 일들을 회상하여 <<징비록>>을 썼다. 이 책은 후세 사람들이 임진왜란에 교훈을 얻어 다시는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쓰여진 것이다.
1607년(선조40), 유성룡은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선조는 슬퍼하여 3일간이나 조정의 일을 쉬었다.
최명길과 김상헌
명분에 입각한 척화파 김상헌, 실리에 중시한 주화파 최명길, 이 둘은 처음에는 같은 학문의 길을 걸었다.
처음에는 둘이 사이가 나쁘지 않았는데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이가 나빠지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극으로 나빠지게 된다. 서로 주장하는 파가 다르니 사이가 당연히 나빠지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청군에 의해 남한 산성에 포위대고 나서 최명길은 인조가 있던 남한산성과 청군영을 부지런히 오가며 강화를 준비하였고, 김상헌은 그런 최명길을 비판하면서 계속해서 척화만을 주장하였다.
남한산성에서 항복 문서를 작성할 때 그것을 찢으며 통곡한 김상헌(金尙憲)이나, 찢어진 항복 문서를 다시 붙이는 최명길(崔鳴吉)에게 모두 깊은 속뜻이 있다.
정조의 측근, 채제공
1758년 도승지로,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한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 채제공은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천주교,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었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 채제공은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을 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천주교,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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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오선지위의 딱정벌레 2008/08/26 23:48 삭제
Subject: 뛰어난 주군에게는 참모가 있다 : 조선의 킹메이커
<조선의 킹메이커>는 '8인8색 참모들의 리더십'이란 부재를 달고있다. 조선의 참모 8명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말처럼 '킹메이커'라기보다는 '참모'라는 의미가 더 맞다. 호흡이 짧고 평이한 문체라 감흥이 떨어진다. 그리고 한참전에 읽은 제왕들의 책사와 유사한 책이다. 뛰어난 주군이 있어야 참모가 존재한다. 조선의 킹메이커 8명의 선정 기준이 모호하다. 제목과 선전기준이 모호하다. 특히 황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청백리는 아닌다. 오늘의 우리가 알..



